대통령 부인과 셀카 찍는 기자들… 팬클럽인가?
네티즌들 "창피하다" "놀러 갔나" 비난 쏟아져
주가조작·논문표절·허위경력 의혹 질문했어야
'기자들, 힘센 권력에 스스로 순응' 비판 자초
“여사님, 저랑 셀카 한 번 찍어주세요!” “저도요, 저도요! 까르르, 까르르!”
얼마 전 대통령실이 공개한 사진 한 장을 보면서 이런 장면이 떠올랐다. 미국 방문을 마치고 귀국 길에 오른 윤석열 대통령 부부가 전용기 내 동행한 취재진에게 인사를 하러 왔다. 윤 대통령은 출입기자들에게 ‘재미있었나’‘좌석이 좁지는 않은가’라며 악수를 나눴다고 한다.
일부 기자들은 부인 김건희 씨에게 ‘잘 주무셨나’라고 묻고는 ‘셀카’ 촬영을 요청했는데, 김 씨가 ‘흔쾌히’ 요청에 응했다고 한다. 기자들이 김 씨와 활짝 웃으며 셀카를 찍는 장면은 다시 대통령실 전속 사진사가 찍어 홈페이지에 공개했다.
인터넷과 SNS는 들끓었다. 네티즌들은 ‘기자들이 전용기 타고 단체로 패키지여행 다녀왔냐’, ‘기자가 질문은 안 하고 셀카놀이 하고 있나,’‘미국 기자들한테 배워라,’‘창피하다’ 등등 비난을 퍼부었다. 대통령실은 몇 시간 만에 사진을 홈페이지에서 지워버렸다. 아마 사진 속 기자들의 삭제 요구가 있었을 것이다.
기자들은 억울하다고 생각했을 것이다. 취재 마치고 귀국하는 길에 대통령 부인과 셀카 한 번 찍은 게 뭐 그리 욕먹을 일인가, 기자는 셀카도 찍으면 안 되나, 이렇게 생각해서 그럴 것이다. 공개되지 않았다면 아무 문제없었을 일인데 공연히 욕을 먹고 있다고 생각했을지도 모르겠다.
정말 기자는 대통령 부인과 셀카도 찍으면 안 되는 것인가? 그리고 이렇게 심하게 욕을 먹어야 하는 일인가? 사실은 이런 질문을 던지는 것 자체가 서글픈 코미디다.
일선 기자들이 권력자 앞에서 마치 치어리더나 팬클럽 회원처럼 행동하는 모습은 보는 사람을 오히려 민망하고 부끄럽게 한다. 일선 기자들의 직업에 대한 자부심과 직업윤리가 언제 이렇게 바닥까지 떨어졌나 싶어 헛웃음이 나올 정도다.
기자들 스스로 권력과 ‘대등한’ 위치 아닌 ‘팬클럽’으로 격하
기자들이 대통령이나 부인과 기념사진을 찍은 일은 예전에도 있었다. 인터뷰나 어떤 의미 있는 행사를 다 마친 뒤 현장에서 기념사진을 찍는 게 부자연스러운 일은 아니다. 노무현, 문재인 대통령 때에도 인터뷰나 산행 뒤 현장에 있던 기자들은 기념사진을 찍었다. 기자는 개인 자격으로서가 아니라 자기 언론사를 대표해서 그 시간을 공식적인 기록으로 남기기 위해 사진을 찍는다. 그러나 이번 ‘김건희 씨 셀카 촬영’은 아무리 봐도 좀 다르다. 대통령 미국 방문 이벤트에 자기 회사를 대표해 동행 취재했다는 사실을 공식적으로 남기기 위해 찍은 사진이 아니다.
이날 기자들은 무슨 유명 연예인을 만난 것처럼 셀카 촬영을 요구했고, 김건희 씨를 가운데 두고 행복한 표정으로 웃으며 셀카를 찍었다. 기자들은 마치 ‘김건희 팬클럽’ 회원처럼 보였다. 각자 자기 언론사를 대표해 그 순간 그 자리에 있었다는 점을 인식했더라면 이렇게 팬클럽 회원처럼 표정 짓고 행동하지는 않았을 것이다.
기자는 언제나 자신의 소속 언론사를 대표하는 지위로 취재원을 만난다. 나이가 어리든 경험이 부족하든, 기자는 개인 자격이 아닌 자기 매체를 대표하고 독자(시청자)를 대신해서 취재원을 만나기 때문에 대통령을 만나거나 재벌 총수를 만날 때에도 당당히 질문할 수 있는 것이다. 수습기자 시절 받는 교육 내용이다. 취재원과는 적당한 거리와 긴장관계를 유지한다는 '불가근불가원'이라는 취재 기본 원칙도 있다.
자신이 소속 언론사의 대표로 취재 나온 기자라는 사실을 망각하지 않았다면, 대통령 부인 김건희 씨가 불가근불가원의 취재대상이라는 사실을 망각하지 않았다면, 그날 민망한 셀카촬영 요청 같은 일은 일어나지 않았을 것이다. 그러니 이번 셀카 사진 때문에 시민들로부터 받는 비난에 너무 억울해해서는 안된다.
기자들, 김건희 씨에 '주가조작 의혹’ 질문 안 해
전용기에서 만난 김건희 씨에게 기자들이 셀카 요청이 아니라 도이치 모터스 관련 질문을 했어야 했다는 지적이 나온다. 당연하다. 시민들은 김건희 씨에게 주가조작 의혹에 대해 진실을 물어보고 싶어 한다. 그걸 기자가 대신 물어봐줘야 한다.
이번에도 기자들은 그런 질문은 하지 않고, ‘셀카를 찍어도 되느냐’라고 물었다. 셀카를 찍어도 되냐고 질문한 것은 기자라는 직업을 '팬클럽 회원'으로 부끄럽게 만들었고, 주가조작 의혹에 대해 질문하지 않은 것은 기자로서의 의무를 방기한 것이다.
기자는 여러 가지 특권을 누리고 있는데, 그 가운데 가장 중요한 특권은 ‘질문의 특권’이다. 시민을 대신해 질문해 달라고, 민주주의의 주인인 시민이 언론에 부여한 특권이다.
우르르 몰려다니면서 밥 얻어먹고 술자리에서 손뼉 치며 노래하라고 부여한 특권이 아니다. 주가조작, 논문표절, 경력조작 의혹을 받고 대통령 부인에게 시민들이 궁금해하는 걸 물어보라고 준 특권이지, 셀카 찍어 자랑하라고 준 특권이 아니다. 그러니 역시, 질문은 하지 않고 셀카나 촬영했다고 비난하는 시민들에게 억울한 마음을 품어서는 안 된다.
윤 대통령 방미 중 보여준 국내 언론의 정권 무비판-부실 비판도 비난 자초
이날 전용기를 탔던 기자들은 왜 김건희 씨에게 '주가 조작 혐의' 관련 질문을 하지 않았을까? 한국 기자들이 정말로 질문을 못하는 것은 아니다. 노무현, 문재인 대통령 때에는 먼저 질문하겠다고 앞다퉈 손을 들었고, 뼈아픈 질문도 주저하지 않았다. 그런데 이명박·박근혜 대통령의 기자간담회에서는 두 손을 공손하게 모은 채 질문하지 않았고, 윤석열 대통령에게는 ‘외람되지만’이라면서 질문을 아꼈다. 어떤 정권에는 가혹하게 따져 묻고, 또 어떤 정권에는 공손할 뿐이다.
대중이 ‘셀카 기자’들을 거칠게 비난하는 것은, 이번 윤 대통령 방미 기간 중 우리 언론이 쏟아낸 부끄러운 ‘권력 찬양·미화’ 보도 탓이기도 하다.
미국 기자들이 ‘(바이든에게) 정치 때문에 동맹국을 희생시키는 것 아니냐’, ‘(윤 대통령에게) 도청을 하지 않겠다는 바이든의 약속이 있었나’라는 날카로운 질문을 하는 동안, 전용기를 타고 미국까지 따라간 한국 기자들은 조용했다.
국내 언론에는 냉철한 방미 성과 분석보다는 윤 대통령의 의회 영어연설과 만찬 노래를 찬양하는 기사가 넘쳐났다. 그래서 네티즌들은 ‘외신기자가 한국 국익과 도청 문제를 걱정하는 이상한 나라’라며 분노했다. 시민들의 이런 분노를 이해한다면 이번에도 역시, 시민들의 비난을 너무 서운하게 생각하지 말기 바란다.
"윤 정권에 ‘공손한’ 언론... 스스로 권력에 순응하고 있어" 비판 나와
미국에서 돌아온 뒤 지난 2일 열린 대통령실 출입기자 간담회에서는 기자들은 윤 대통령에게 ‘미국 가서 재미있었던 얘기를 전해달라’, ‘아메리칸 파이를 어떻게 부르셨는지 들을 수 있나’, ‘이번 만찬 노래도 다들 놀랐는데 스타덤을 실감하고 있나’ 등의 질문을 했다고도 한다.
이 정도면 대통령실 출입기자들에게 왜 거기 가서 앉아있는지 물어봐야 할 것 같다. 길들여진 ‘애완견’ 임을 입증하려고 대통령실을 출입하는 것인가?
한국기자협회가 지난 4일 주최한 ‘윤석열 정부와 언론, 그 1년을 평가한다’ 토론회에서 이런 말이 나왔다. ‘기자들이 권력에 순응해 가는 모습을 보인다. 정권의 나팔수라는 비판을 자초하고 있다.’ ‘바이든-날리면’ 파동 때 대통령실과 설전을 벌였던 MBC기자의 말이다.
윤석열 정부 1년 만에 언론자유가 무너지고 있는 것도 문제지만, 언론이 스스로 권력에 순응하고 길들여지는 게 더 걱정스럽다. 나라를 낭떠러지 몰고 가는 권력은 도대체 누가 견제하나?
출처 : 세상을 바꾸는 시민언론 민들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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