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들만의 나라였다
‘특별한 대통령’ 때문에 말들이 많다. 대통령이 워낙 예측불허이다 보니 저마다 그를 이해해 보려고 시도한다. 성장배경이라든가 검사로서 잔뼈가 굵은 직업 경로 등 그의 개인적 특성을 가지고 그의 심리와 행동을 추론하는 게 대부분이다. 그런데 최근 그러한 개인사로는 더 이상 추론이 불가능한 일이 벌어지고 말았다. 이번 한일회담과 3.1절 기념사에서 보인 대통령의 모습에서 그만 말문이 막혔다. 우리 대통령이라고는 믿기지 않을 정도로 일본에 넙죽 엎드려 머리를 조아리는 듯한 태도와 발언은 도무지 이해되지 않았기 때문이다. 저렇게 엄청난 일을 혼자서 판단하고 저지를 수 있는 일인가 하는 의문을 갖지 않을 수 없다. 더구나 그는 현실 정치인으로서 줄곧 낮은 지지율 때문에 전전긍긍하지 않았던가.
이해되지 않는 ‘특별한 대통령’
그동안 보수 정권이 들어설 때마다 친일논란이 없었던 건 아니지만 이렇게 대놓고 일본에 나라를 넘기는 듯한 태도를 보인 건 처음이다. 그의 부친이 일제 문부성 1호 장학생이었으며 뉴라이트 연합과 가까이 지낸 걸로 볼 때 이 집안에는 친일의 피가 흐르고 있다는 게 그나마 타당한 이유처럼 보였다. 설령 그렇다 하더라도 굳이 이렇게까지 노골적으로 해서 득 될 게 뭐가 있을까? 그러자 마침내는 무속 이야기까지 등장한다. 대통령의 멘토라는 무속인의 친일발언이 그 증거라는 것이다. 하지만 아무리 서로 특별한 관계라 하더라도 매국노 소리 듣기 십상인 얘기를 그렇게 섣부르게 내지를 것까지는 없지 않았을까.
이번에는 그의 애국충정을 생각해볼 수도 있다. 한 나라의 지도자로서 나라의 존망이 걸린 일이라고 판단되면 때로는 굴욕쯤은 대수롭지 않게 생각할 수도 있을 것이기 때문이다. 그런데 지금이 구한말처럼 나라의 위세가 형편없이 추락한 때도 아니지 않은가. 오히려 정치적으로는 민주주의 수준에서 우리가 일본보다 한 수 위인 데다, 경제적으로도 20년 이상 장기침체에 허덕이는 일본과 대등한 수준에 이르고 있기도 하다. 그뿐만이 아니다. 미국 일변도의 외교정책을 펴왔던 일본은 미국의 약화와 함께 동아시아에서 점점 고립되고 있던 터였다. 이런 판국에 뭐가 아쉬워 일본에 머리까지 숙여야 했을까?
그렇다면 그는 순수한 휴머니스트여서일까? 아무리 비정한 국제무대라 하더라도 먼저 선한 뜻을 가지고 손을 내밀면 상대도 그에 걸맞게 응답할 것이라는 순진한 생각 말이다. 지금까지 대통령 주변에서 나오는 얘기로는 순수한 마음으로 나라를 위해 ‘큰 결단’을 내렸다는 것이다. 그런데 그렇게 인간미 넘치는 도덕군자라면 왜 국내 정치에서는 그토록 잔인한가? 취임 1년 동안 그가 요란하게 벌인 일이라곤 검찰을 동원하여 정적들을 무자비하게 제거하는 일뿐이었지 않은가.
이렇게 그를 ‘특별한 개인’으로 놓고 봐서는 도무지 납득되지 않는다. 그런데 시야를 조금만 넓게 펼쳐보면 우리 역사에서 매판적 지도자가 끊이지 않았음을 알게 된다. 위정자들은 어떻게든 자주적인 나라를 만들려거나 백성과 민중의 안위를 먼저 챙기기보다는 오히려 권력을 지키는 일이 우선이었던 게 그들의 본모습이었다. 그렇게 해서 초래된 고통과 희생은 고스란히 백성과 민중들의 몫이었다. 함석헌이 “한국의 역사는 고난의 역사다”라고 단언했던 것도 그것이 “부끄럽고 쓰라린 사실”이었기 때문이다. 특히 나라가 커다란 환난을 겪고 있을 때면 여지없이 위정자들은 국민을 배신하였다. 자신의 안위와 권력의 보존을 위해서라면 국민의 생명쯤은 헌신짝처럼 버렸던 것이다.
뿌리 깊은 사대주의
‘힘’ 앞에 맹종하는 사대주의는 이미 조선 시대 때부터 골이 깊어졌다. 조선 시대의 왕과 사대부들은 명나라를 아버지의 나라라며 받들고 그들의 학문을 경전으로 모시면서, 정작 자기 백성들은 골육까지도 짜내는 수탈의 대상일 뿐이었다. 그러다 환난이 터지면 궁궐과 백성을 버리고 버선발로 도망하기 바빴고, 오갈 데 없는 애먼 백성들만 외적들에게 도륙당했다. 임진왜란 때 선조가 그랬고, 병자호란 때 인조가 그랬다. 오죽했으면 참다못한 민중들의 봉기가 유독 조선 시대에만 끊이질 않았을까.
그렇게 썩은 대들보로 나라 꼴을 억지로 지탱해 오던 조선도 결국 그 수명을 다하게 되는데, 이때 위정자들의 민낯도 적나라하게 드러났다. 고종은 열강들 사이에서 이리 붙었다 저리 붙었다 허둥대고, 명성황후 민비는 외척들을 동원하여 매관매직과 수탈을 일삼았다. 대신들도 대세를 좇아 일본의 앞잡이가 되어 나라를 일본에 넘기는 데 앞장섰다. 동학 2대 교주 최시형에게 사형을 언도했던 판사가 다름 아닌 탐관오리의 상징이었던 고부 군수 조병갑이었고, 동학군 사령관 전봉준을 심문했던 검사가 이완용이었으니 더 말해 뭐 하겠는가. 그럼에도 민중들은 그런 나라를 잃지 않으려고 몸부림쳤고, 제나라를 되찾겠다고 목숨을 바쳤다.
부끄러운 전통은 해방과 함께 단절될 법도 한데 도리어 더 기승을 부렸다. 공교롭게도 역대 대통령 가운데 보수적인 대통령들은 한결같이 매판적이었고 권력을 사유화했다. 특히 보수진영에서 추앙하는 대통령들이 더 심했다. 대한민국 초대 대통령으로서 보수진영에서는 국부로 칭송되는 이승만 대통령이 보인 행동은 한때 독립운동가였다는 게 의심스러울 만큼 굴종적이었다. 해방을 맞은 독립 국가의 첫 지도자이니만큼 국가운영의 비전과 철학을 가다듬는 게 급선무였을 테지만 그러기는커녕 시종일관 미국에 영혼을 내주고 친일파들과 손잡고 정적 죽이기에만 몰두하였다. 6.25가 터지자 이승만은 가장 먼저 줄행랑을 치며 한강 다리를 끊어 서울 시민들을 독 안에 든 쥐 신세로 만들었다. 그러고는 미군을 뒤따라 서울로 돌아와서는 고작 한다는 게 ‘빨간 물’이 들었다며 서울 시민들을 무자비하게 학살하는 일이었다.
‘조국 근대화’의 신화로 추앙하고 있는 박정희는 또 어떠한가? 우리가 다 아는 것처럼 그는 무력으로 권력을 찬탈하자마자 독립군을 때려잡는 일본군 장교 출신답게 5억 달러의 배상금을 받고 일제의 침략을 간단히 덮어줬다. 이후엔 철저히 미국의 입맛에 맞게 반공주의를 앞세워 안으로는 민주주의를 압살하고, 밖으로는 미국의 용병이 되어 젊은이들의 피를 팔았다. 박정희를 따랐던 전두환은 권력을 탈취하기 위해 푸르른 오월을 붉은 피로 물들였고, 그것을 감추기 위해 미국에 매달렸다. 기업 시이오 출신답게 이명박은 ‘아륀지’와 ‘기업 프랜들리’를 외치며 미국에 넙죽 엎드렸고, 박근혜는 일본군 위안부 졸속 협상에 이은 지소미아 체결로 일본에 굴욕적인 미소를 보냈다.
기득권 세력이 문제다
이렇게 굴욕의 역사를 훑어가다 보면 지금의 대통령만 나무랄 일이 아니라는 걸 깨닫게 된다. 특이한 것은, 조선 오백 년 내내 그리고 해방 이후 오늘에 이르기까지 극히 예외적인 몇몇 지도자들을 제외하고는 대부분 위정자들이 일관되게 강대국에 빌붙어왔다는 사실이다. 그러다 보니 강대국의 힘 앞에 열등감과 패배주의가 어쩔 수 없는 당연한 현실인 것처럼 굳어졌다. 그렇다면 그것은 명멸해 갔던 수많은 국가 지도자들의 개별성과는 관계없이 일정한 흐름을 유지하게 하는 힘을 가진 세력이 실제로 사회를 지배해 왔다고 보는 게 타당하다. 이것은 최고 권력자가 누구냐 하는 것도 중요하지만 그를 둘러싼 세력이 더 큰 문제였다는 것을 말해준다.
이 나라의 힘을 가진 세력이 강대국 앞에만 서면 한없이 약해지는 전통이 만들어 진 것은 이들이 나라 전체를 위하는 공적 명분보다는 사적인 집단이익에 매몰되었기 때문이다. ‘군자는 덕을 품을 때 소인은 땅(이익)의 것을 품고, 군자는 형(엄격함)을 품을 때 소인은 혜(혜택)를 품는다(君子懷德 小人懷土 君子懷刑 小人懷惠)’라는 논어의 경구가 말해주듯, 사익을 추구하는 자는 그것을 잃을까 전전긍긍하여 부끄러움도 모르고 비겁한 짓을 밥 먹듯 하기 마련이다.
조선시대의 왕권은 우리가 상상하는 것만큼 절대적이지 못했다. 붕당정치가 말해주듯 왕의 권력은 사대부들에 의해 제한되었다. 광해군이 야심 차게 북벌을 추진하자 명나라를 끔찍이 섬기던 서인-노론 세력이 광해군을 쫓아냈는가 하면, 심지어는 사대부들의 이익과 어긋나는 왕이나 세자 여럿을 독살했다는 의혹도 있다. 청나라 강희제가 “조선의 왕은 신하의 제재를 너무 받아 능히 정치를 펴지 못한다”(<숙종실록> 6년 9월 12일)라는 말까지 했다고 전해지니 당시 사대부들의 위세가 어떠했을지 짐작이 간다.
재야 사학자 이덕일은 인조반정 이후 패권을 장악한 노론 세력이 조선의 마지막 300년을 지배했으며 구한말에는 그들이 친일파로 변신했다고 말한다. 또한 그는 일제하 식민사관에 물든 친일파 역사학자들이 해방 후에는 한국 역사학계의 주류를 형성하여 오늘날까지 이어져 오고 있으며, 그 결과 현재 한국의 강단 역사학계는 진보와 보수를 막론하고 식민사관의 세례를 받지 않은 학자들이 거의 없을 정도로 강고한 카르텔을 형성하고 있다고 고발한다. 그래서일까. 요즘 ‘한일 굴욕회담’에 대해서 연일 대학교수들의 규탄 성명이 잇따르고 있는 가운데, 자세히 들여다보면 가장 먼저 비분강개하며 나섰어야 할 역사학자들의 모습은 눈에 띄지 않는다.
이런 사실에 비추어 보면 현재 한국 사회를 실제로 지배하고 있는 것은 최고 권력자와 몇몇 주변 사람들이 아니라는 점을 새삼 알게 된다. 영화 ‘내부자’에서 암시한 것처럼 소수의 엘리트 집단이 강고한 카르텔을 형성하며 나라를 좌지우지하고 있는 게 현실이라고 보는 게 더 정확할지 모르겠다. 그런데 믿지 못하겠지만 그들에게는 나라 걱정보다는 자신들의 이익과 권세가 훨씬 더 중요하다. 그래서 그들은 자신들의 이익과 맞아떨어지기만한다면 심지어 나라를 팔아넘기는 것조차 서슴지 않았다. 그런 이유로 지금도 그들은 무지한 대통령을 앞세워 대다수 국민이 굴욕적이라고 하는 행동을 태연히 저지르고 있는 것이다. 그럴 때마다 저들은 열강에 둘러싸인 반도 국가의 지정학적 숙명을 탓하며 분노하는 우리를 주저앉히려 한다. 저들은 민심에 밀려 잠시 후퇴한 적은 몇 번 있었어도 수백 년 동안 자신들의 이익을 성공적으로 관철해 온 저력이 있음을 믿고 있을 것이다.
고난은 결코 운명의 장난이 아니다
이렇게만 놓고 보면 현실은 솔직히 절망적이다. 민중들이 깨지고, 죽고, 촛불을 밝혀가며 무너진 나라를 어렵게 되살려 놓으면 다시 저들은 하루아침에 나라를 분탕질하는 악순환이 반복되고 있으니 말이다. 하지만 우리가 절망하기 위해 살아가는 게 아닌 것처럼, 오히려 ‘고난이 생명의 원리’라고 받아들이는 게 차라리 속이 편할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냉정한 눈으로 세계를 돌아보면 '눈물과 고난의 역사가 없는 곳이 없다'는 사실을 마주하게 된다.
함석헌은 <뜻으로 본 한국 역사>에서 이렇게 말했다. “고난은 결코 자연현상이 아니다. 잔혹한 운명의 장난도 아니다. (…) 착한 것이 나약으로 떨어지지 않기 위하여, 잃었던 용기를 다시 찾기 위하여, 약아빠짐으로 타락해버린 지혜를 도로 끌어올리기 위하여, 굳센 의지가 자아가 되고 고결한 혼을 다듬어내기 위하여 불같은 고난이 필요하다”라고. 다시, 이를 악물고 신발 끈을 질끈 묶고 일어나야 할 때다.
출처 : 세상을 바꾸는 시민언론 민들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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