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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치.사회.시사

거짓말로 꾸민 ‘돌풍’만큼 위험한 영화 ‘행복의 나라’ - 출처:민들레

by 꿀딴 2024. 8. 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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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동진 칼럼] 12.12 앞둔 시기 다룬 대체역사 영화
실제와 허구를 원칙 없이 마구 섞어 역사 실체 왜곡
'거짓에의 유혹'… 옳은 영화 아니나 권하고픈 영화

 

오랫동안 베일에 싸여 있던 영화 ‘행복의 나라’가 선의의 거짓말로 가득 찬 영화임이 드러났다. 늘 이 지면을 통해 얘기하는 것이지만 ‘행복의 나라’는 영화의 금과옥조인 윤색의 윤리학을 넘어섰다. 그 도를 넘어도 한참 넘어섰다. 영화를 보는 내내 사람들은 양가적(兩價的) 감정에 휘말릴 수밖에 없는데 한편으로는 역사적 분노로 인해 펑펑 울어 대면서도 한편으로는 이렇게까지 하는 건 곤란하다는 생각을 지울 수 없게 한다. 

결과적으로 이 영화는 잘못됐다. 그건 얼마 전 넷플릭스 드라마 ‘돌풍’에 대한 감정을 소환시킨다. ‘행복의 나라’는 ‘돌풍’의 반대편에 서 있는 또 다른 의미에서 ‘위험한’ 작품이다.
오동진 영화평론가

 

영화 '행복의 나라'의 한 장면

 

12.12를 앞둔 암울한 시대 배경으로 한 대체역사 영화

‘행복의 나라’의 기본 배경은 10.26과 12.12이다. 우리의 가장 암울했던 역사. 영화는 여기서 조금 더 좁게 들어간다. 박정희 시해자들 중 유일한 군인이었던 박흥주 대령과 그를 변호했던 국선 변호사 태윤기의 이야기를 파고든다. 영화는 몇몇 인물들을 상당히 극화시켰는데 박흥주는 박태주(故이선균)로, 태윤기는 정인후(조정석)로, 전두환은 전상두(유재명)로 나온다. 그건 좋다. 영화는 실제 인물에게 캐릭터를 부여하고 거기서 극적 에피소드를 뽑아내야 하는 법이다. 문제는 그것조차, 있었던 사실을 얼마나, 또 어느 정도까지 허구화시켰느냐이다. 

 


‘행복한 나라’가 추구했던 것은 일종의 대체역사이다. 예컨대 복거일의 유일하게 뛰어난 원작소설인 『비명(碑銘)을 찾아서』 같은 것이다. 이 소설을 2002년 이시명 감독이 영화로 만든 번안물이 바로 ‘2009 로스트 메모리스’였다. 한국은 일본 제국주의로부터 독립하지 못했다는 가상의 대체역사가 배경이다. 철저하게 일본인으로 살아가는 한국인 주인공 사카모토 마사유키(장동건)가 역사의식을 되찾고 레지스탕스에 합류하게 된다는 이야기이다. ‘행복의 나라’ 역시 큰 범주에서 보면 이 같은 대체역사물이다. 역사를 가상으로 다시 꾸민다는 말이다.

그러나 대체역사물의 경우 반드시 지켜야 할 규칙이 있다. 시공간과 그 안에서 벌어지는 일을 가상의 것으로 만들어야 한다는 것이다. 시공간은 사실인데 캐릭터나 에피소드를 너무 허구로 만들면 안 된다. 반대로 등장인물들은 다 실재 인물인데 시공간이 가짜인 식이어도 안 된다. 그렇게 되면 실제와 허구가 뒤섞이고 헷갈리게 된다. 과거에 실제로 벌어졌던 역사적 사건이 알고 보니 이렇게 그럴듯한 가짜에 불과한 일일 수 있다는 착시를 불러일으킨다. 역사가 교묘하고도 기이하게 왜곡된다. 그것이 비록 선의에 의한 것이었다 한들, 그렇게 역사를 비틀면 안 된다. ‘행복의 나라’는 그 선을 넘었다.

영화 '행복의 나라'의 한 장면

그 시대, 감독이 기대했던 그런 인물은 단 한 명도 없었다

영화에서 정인후 변호사는 1심으로 사형 위기에 처한 박태주 대령을 살리기 위해 고군분투, 혼신의 힘을 다한다. 아마도 어느 정도는 실제로 그랬을 것이다. 그러나 극 초반 정인후 변호사가 군부 실력자 전상두를 사전에 따로 만나는 장면부터 잘못돼 있다는 느낌을 준다. 이 같은 설정은 극 후반, 박 대령의 사형 언도 직전 골프 연습을 하고 있는 전상두에게 무릎을 꿇고 선처를 호소하는 정인후의 장면, 곧 이 영화가 내세우는 대단원의 클라이맥스를 위해 필요한 장면이었을 것이다. 그러나 그건 실제와는 아주 거리가 먼, 아예 없던 일이었다. 박흥주의 변호인은 전두환과 대면한 적이 없으며 그의 앞에서 그를 비판하거나 비난할 용기를 내보인 적도 없다. 그럴 수 있는 시대가 아니었다. 

 


계엄사령관 정승화도 정진우 장군(이원종)으로 나오는데 정인후 변호사는 육본 앞에서 비와 눈을 맞아 가며 장군의 호위 차량을 기다리고 막아서기를 거듭한 끝에 사령관이 최후 증인으로 나가겠다는 결심을 받아 낸다. 이런 일도 1980년 12.12 전에 벌어진 적이 없다. 박흥주 변호인과 정승화 장군이 그런 밀접한 관계를 가진 적이 없다. 둘이서 의기투합, 서로를 안아 본 적도 없다. 정인후는 정진우 장군이 재판에 나가겠다고 하자, 그에게 ”장군님 한번 안아 봐도 되겠습니까?”라고 묻고 그를 안는다. 이런 거짓말은 차라리 귀엽기라도 하다. 영화의 상당 부분, 아니 전부가 감독 추창민의 마음속 희망사항이다. 대체의 역사. 그런 인물들(정지후 변호사나 박태주 대령, 정진우 장군 등)이 1979~1980년에 있었다면 역사가 어떻게 바뀌었을까, 하는 가상의 기대이다. 정인후 같은 변호사가 단 한 명이라도 있었으면 어땠을까, 만약 박흥주 대령이 사형당하지 않고 살아서 복역 후 세상에 나왔으면 어땠을까 하는 기대 심리를 최고조로 높인 것이다.

영화 '행복의 나라'의 한 장면

 

그런데 그러려면 영화 속에서 묘사하는 10.26의 장면들, 12.12의 장면들, 수많은 법정 장면들도 가상의 것으로 꾸몄어야 했다. 진짜 한남동 공관이 나오면 안 되고 진짜 육본이 나오면 안 된다. 아예 10.26, 12.12 같은 날짜도 명시하지 말아야 한다. 모든 걸 허구로 꾸며서 이것은 가짜 얘기이고, 진짜 이런 일들이 있었으면 좋았을 법했다는 얘기일 뿐임을 강조하는 방향이었어야 했다. 대중들은 스스로가 잘 간파하고, 잘 구분해 내며, 잘 알아듣는다. 가짜 얘기지만 사실은 진짜 얘기가 되는 걸 바라는 스토리임을. ‘행복의 나라’는 실제와 허구를 원칙 없이 마구 섞어 버림으로써 허구가 주는 재미와 감동은 가져갔을지언정 역사의 실체를 올바르게 깨닫게 하는 큰 우물은 파지 못했다.

 


없던 인물, 없던 사실로 흥분할 수는 없는 노릇 아닌가

영화의 핵심은 박흥주에게 내란음모죄를 씌우려는 군부와 그것을 벗어나게 하려는 변호인 측의 긴박한 대립에서 찾아진다. ‘행복의 나라’는 한편으로는 일종의 법정 드라마이고, 그렇다면 검찰과 변호인 측이 상대의 수를 먼저 읽는 두뇌싸움, 증거싸움의 얘기가 펼쳐진다는 이야기이다. 변호사 정인후는 박태주에게 반복해서 말한다. “재판은요, 누가 옳으냐 그르냐를 가르는 게 아녜요. 재판은 누가 이기느냐의 싸움이에요!” 만약에 ‘행복의 나라’가 이 부분에 집중해 당시 군부가 증거를 수없이 조작하거나 날조하고 반대편에 선 변호인 측이 이를 간파하고 그걸 피해 가느라 애쓰는 구조로 짰다면 좀 더 그럴듯했을 것이다. 정인후가 끌려가서 고문을 받고(당시 박정희 시해 사건 관련자 국선 변호인 중 취조와 고문을 당한 사람은 없다) 전상두 합수부장 측근들에게 반 병신이 될 만큼 얻어 맞거나 하는 장면은 대중의 분노를 유발할 수는 있어도 대중들로 하여금 올바른 역사적 심판을 위한 길로 인도하지는 못한다. 영화가 한순간의 휘발성을 위해 실제와 허구를 마구 뒤섞어서는 안 된다.

영화 '행복의 나라'의 한 장면

 

‘행복의 나라’는 사람들을 많이 울릴 것이다. 그건 우리의 1980년대가 억울한 사람들을 죽이고, 고문하고, 때리고 짓밟았기 때문이다. 물리적인 폭력은 많이 없어졌다 해도 지금 이 시대도 사람들을 법리적으로 죽이고, 고문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 연상작용 때문에 사람들의 심금을 엄청나게 쪼이게 할 것이다. 그러나 그 감동이 더 크게 확장되기 위해서는 이 영화의 어디서 어디까지가, 전체 중 얼마나 되는 부분이 허구적 에피소드와 등장인물의 성격에 기반했는지를 고백할 줄 알아야 한다. 좋은 거짓말은 없다. 거짓말은 거짓말일 뿐이다. 1980년 계엄시국에서 정인후 같은 소영웅은 존재하지 않았다. 모두들 시대의 광기에 휘말려 날아갔을 뿐이다. 이 영화가 가득 채운 역사적 울분에는 동의하지만 없던 인물, 없던 사실을 가지고 흥분할 수는 없는 노릇이다. 일종의 가짜 뉴스로 대중들을 선동해서는 안 될 일이다.

 


“지금 이 놈의 세상엔 씨발놈들 밖에 남지 않았어”

오랫동안 영화를 베일에 싸이게 하지 말고, 이것은 일종의 대체역사 영화임을 사전 마케팅으로 많이 알렸어야 했다. 막상 베일을 벗으니 심히 당황스럽다. 단 한 가지 사실만은 가슴과 머리를 때린다. 1980년대 전두환 일당이 박흥주 대령을 사건 16일 만에 간단하게 처형해 버렸듯이 2020년대 한국의 검경은 박흥주 대령 역의 배우 이선균을 가차 없이 사회적으로 처형했다는 사실이다. 그 극단의, 참혹한 기시감은 사람들에게 세상의 잘못이 반복되고 있음을 알게 할 것이다. 세상은 참으로 변하지 않았다. 그 시대적 교훈을 준다는 점에서만큼은 ‘행복의 나라’가 주는 유의미성은 무궁무진하다. 옳은 영화는 아니지만 권하고 싶은 영화다. 그 이율배반의 미학은 때론 무섭고 황홀한 것이다. 거짓에의 유혹은 늘 그렇다. 

영화 '행복의 나라' 포스터

 

그래도 이 말만은 가슴에 콕 박혀 떠나지 않는다. 대통령 시해범 김영일(김재규 역, 유성주)의 변호인단 대표 이만식(실제 변호사 안동일 역, 우현)은 박태주에게 사형이 확정될 즈음 책상을 치며 이렇게 한탄한다. “이 놈의 세상엔 지금 씨발놈들밖에 남지 않았어.” 그 일갈이 좋다. ‘행복의 나라’는 위험하지만 매혹적인 작품이다.

출처 : 세상을 바꾸는 시민언론 민들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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